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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조선 주먹의 강자인가?...5위부터 1위까지

짱도 2016. 5. 1. 14:43

http://cafe.daum.net/pharangse/IbOr/219 

**누가 제일의 강자인가? 조선의 주먹 순위...5위부터 1위까지

 

 

황당하면서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질문에 대해 글을 올리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싸움이란게 상대성이 크고 주먹들이 활동하던 시기들이 다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움에도 불구 본인 개인적으로 결정, 역대 조선 최고의 주먹을

뽑아보도록 하겠다.

5명을 선정하기로 결정했는데 조선 주먹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30~50년대에

활동하던 주먹들이 선정되었음을 미리 밝혀두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5위: 홍영철(洪英喆.생몰년도 미상)

별로 잘 안 알려진 주먹이지만 그의 실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맞짱 실력을 두고

당대 최고 중 하나였었다고 입을 모은다.

소공동 보스로 알려진 홍영철은 평양이 고향인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걸 면해 보고자 운동을 시작한 그는 온갖

무술과 수많은 싸움경력을 통해 당대 최고의 주먹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또한 홍영철은 당시 주먹으로는 드물게 대학출신으로도 유명했다. 당시 학생주먹의 양대

산맥이었던 건대의 유지광이 존재했지만 실제 실력에서는 홍영철이 한수위였다는게

주먹가의 중론이었고 그는 지금도 학생주먹의 원조로 불리운다.

돗수높은 안경을 끼고 싸우는 걸로 유명했는데 맞아본 기억이 없기에 벗지 않는다고 한다.

매끈하고 여성스런 외모와 함께 깨끗한 매너로 말미암아 기생들 사이에서는 홍영철과

함께 있어 보는게 꿈이었다는 기생이 당시 서울바닥에 상당수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홍영철을 주먹세계에서 인정케한 가장 큰이유는 그의 발차기 때문이다.

현존했던 모든 주먹중 발차기 하나만 따지고 보면 홍영철을 능가 할 자가 없었다는게

그 당시 주먹가에 떠돌던 이야기였고 홍영철이 한번 뜨면 대 여섯 주먹이 추풍 낙엽처럼

무너진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날렵하기 그지 없는 주먹이었다.

맞짱 승부에서도 주먹계를 떠나기 전까지 패한 역사가 없는걸 주먹계에서 공인받은 몇

안 되는 주먹 중 하나였고 그로 말미암아 당시 동대문이나 명동파등 대형조직에서도

소공동파를 절대 무시할 수 없었고 그 중심에는 발차기의 달인 홍영철이 있었다.

심지어 주먹계의 큰 형님인 시라소니조차 홍영철만은 맘대로 대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홍영철의 주가를 한껏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주먹들을 이야기 할때

빼놓을 수 없는 실력자가 바로 홍영철이다.

 

*4위: 이화룡(李華龍.1914~1984)

평양이 낳은 또 하나의 거물주먹으로써 명동파의 보스로 유명하다. 매서운 눈매는 보는것

만으로도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박치기 실력 또한 일품이었다.

아오키 박두성과 더불어 평양에서 어려서부터 주먹을 인정받은 타고난 싸움꾼이었고

대륙으로 진출 수많은 무용담을 탄생시켰다. 남쪽에 뿔뿔이 흩어진 이북주먹들을 모아

명동파를 조직 동대문 종로와 더불어 서울을 삼분하는 조직으로 발돋움시킨 장본인

이기도 하다.

성격 또한 화통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훗날 서대문 형무소에 부하들과 수감 되었을 때

모든 죄를 덮어쓰고 부하들을 풀어달라고 부탁한 사건은 그의 이런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례이다.

 

이북 출신에게는 한없이 따스하나 이남출신 주먹들에게는 차가운 면을 보여주었는데

이정재와는 둘 도 없는 원수사이로 유명했던 주먹이었다.

대륙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박치기 하나로 이름을 떨쳤으나 월남한 다음에는 본인이

직접 싸운 사례는 극히 드물 정도로 조직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비록 월남한 이후에는 싸움경력이 미미했지만 그가 젊은 시절 쌓아놓은 경력만으로도

충분히 이름을 거론할 만한 인물이 명동황제 이화룡이다.

 

*3위: 이정재(李丁載,1917~1961)

동대문 보스로 유명했던 이정재. 평양 신의주와 더불어 조선 주먹의 3대 메카라는 경기

이천출신이다. 이천은 이정재 외에도 뛰어난 주먹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학생주먹

유지광과 헌병대 출신으로 시라소니 린치사건의 핵심인물인 이석재도 바로 이천이

고향이다.

이정재는 본시 씨름꾼 출신이었으나 동대문에서 장사를 할때 주먹들과 시비가 벌어지자

그 자리에서 메다 꽂은 소문이 널리 알려 져 주먹세계로 입문한 케이스이다.

주먹족보로 따지자면 이정재가 당시 주먹으로는 드물게 학력이 높았으므로 김두한의

꼬봉 출신으로 출발했으나 훗날 김두한과 시라소니등 당대 최고의 주먹들을 주먹계에서

바닥으로 추락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주먹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는 대표적 인물인데 이런 경우는 그가 주먹에게 가장 필요한 의리를 져 버렸기

때문인걸로 풀이된다.

(김두한은 그가 경제적 어려움에 쳐 했을때 수시로 도와줬었고 시라소니는 이정재가

부산 피난민 시절 집단 린치를 당하려 하자 직접 나서 이정재를 구해 준 일이 있었다.)

씨름꾼 시절에는 전국 씨름대회를 3연패 한 장사 출신이었으며 박치기 또한 제법 잘

했던걸로 알려진다.

이정재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게 그의 뚝심과 맷집인데 젊은

시절 10여명에게 린치를 당해 피걸레가 된 후 단 이틀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복수를

하러 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집도 대단해 자신이 한번 찍어놓은 인물은 반드시 찾아가 복수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의사당에 난입해 김두한에게 폭언을 한후 휴게실에서 김두한을 주먹으로는 아니지만

처참하게 밟아 놓은 예이랄지 겁없이 날 뛰던 시라소니를 자신의 사무실로 유인 집단

린치를 가해 시라소니 주먹인생을 끝장나게 했던 사건은 그의 이런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의 역량은 동대문파를 가장 큰 조직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싶다. 조직을 운영하는 솜씨에 있어서는 확실히 이화룡 김두한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5.16 이후 깡패소탕령에 의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 역시 조선을 대표하는

주먹중 하나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지 그는 전문적 싸움꾼이었다기 보다는

당대 최고 조직의 보스로 사람들 눈에 각인되어 있다.

 

*2위: 김두한(김두한.1918~1972)

장군의 아들로 널리 알려진 김두한은 이남을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주먹이다.

어린시절 수표교 다리 밑에서 거지패로 출발 사건의 진위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주먹

1세대인 구마적과 신마적을 차례로 무너뜨린 예는 그의 캐리어에 가장 정점을 차지하는

사건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큰 덩치와는 다르게 스피디한 몸놀림을 자랑했으며 특히 그의 펀치는 잇뽕(한방)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천하 일품이었다.

그의 펀치력에 관한 일화는 너무나 많지만 시멘트벽을 그대로 내지르면 금이 갔다고

하고 벽만 끼고 싸우면(뒤에 눈이 없기에..)황소 대여섯마리도 때려 잡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 했다.

발차기 또한 홍영철에 버금가는 예술의 경지에 올랐었는데 발차기 하나로 상대의 뺨을

가지고 놀았다는 일화랄지 일본 칼잡이 수십명과 벌인 맞짱 승부는 지금도 주먹 역사의

명장면으로 빠짐 없이 기록되곤 한다.

 

하지만 그기 주먹계에서 손을 씻고 국회로 들어가면서 그의 주먹인생은 많이 희석되었다고 볼수있다.

한참 전성기를 내달릴 시점에 국회로 돌아 간 것도 그러하거니와 그 유명한 국회에서

벌인 이정재와의 시비 도중 이정재를 때려 눕히지 못한채 힘없이 풀어준 점은 그의 주먹

인생에서 옥의 티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휴게실까지 쫓아와 폭언을 일삼는 이정재 패거리에게 뒤꽁무니를 뺀 일화는

이정재의 성가만 드높였을뿐 주먹계에서 그가 이뤄놓은 성과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70년대 정릉에서 벌이던 부동산사업의 실패로 인해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고 말아

더욱더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가 조선에서 특히 이남에서는 가장 뛰어난 주먹이라는

사실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별로 없을것이다.

 

*1위: 이성순(李聖淳,1916~1983)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나이를 1위로 선정하였다.

2위부터 5위까지야 사람들에 따라서 순위가 달라지겠지만 아마 주먹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시라소니를 첫 손에 꼽을것이다.

신의주가 고향인 이 불세출의 주먹은 한마디로 싸움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신화를 이뤄낸 사나이다.

그의 주먹경력은 크게 세단계로 나뉠 수 있는데 13세가 되던 해 싸움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부터 약관 20세에 이북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평양으로 날아가

일거에 때려 눕힌후 이북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기까지가 그의 싸움경력 중 초기라

할 수 있겠다.

이 당시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13세 이후부터 20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두세번 정도 신의주와 인근지역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경력이 싸움꾼의 요소중 가장 첫손에 꼽히는걸로 봐서 그 당시 그는 이때가 수련기

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 중국으로 날아가 대륙을 평정하던 시절을 중기로 볼 수 있는데 20살부터 시작해

30살 무렵까지 말그대로 날고 긴다는 일급주먹들(쿵후의 고수들 등등)만 때려잡아 그의

성가를 높였다.

이 당시 중국에는 이북에서 손꼽히는 주먹들도 대거 진출했는데 시라소니 만큼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대개 한곳에 정착해 그 지역으로 들어오는 주먹들만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시라소니는 대륙 전역을 떠돌며 이름있는 주먹들을 직접 찾아가 때려 눕혔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 시기야말로 시라소니를 이야기 할 때 그의 주먹인생중 최고

전성기라 말 할 수 있겠다.

중기를 거쳐 고꾸라 형무소에 복역중 일본의 주먹들도 차례로 제압한후 그는 월남을 하는데

당시 서울에는 다들 알다시피 이정재,이화룡,김두한등 소문난 주먹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대륙에서의 무용담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풍까지 씌워 시라소니는 월남

하자마자 신화적인 존재로 주먹들 사이에서 오르내린다. 그에 걸맞게 그는 월남하자마자

맨발대장과 마사이찌 고영묵을 때려눕히며 화끈한 신고식을 펼친다.

 

결국 너무나 유명한 동대문의 린치사건으로 인해 불구 직전까지 가지만 그 후 장면의

경호원로 활동하다 주먹계에서 영원히 손을 씻었다.

시라소니에 대한 평가는 주먹계에서 더욱 높이쳐 주었는데 유지광은 그의 저서에서 역대

최고의 싸움꾼으로 그를 거론했으며 만화가 방학기씨는 그의 책에서 싸움을 예술로 승화

시킨 사나이라고 평가했었다.

주먹꾼은 아니지만 주먹역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연예계의 대통령 임화수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극장 조라치 시절 지나가다 우연히 그의 신기에 가까운 싸움실력을 본 그는 이후 출근도

하지 않은채 매일 시라소니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고 하고 동대문파의 원로격인 김사범은

그를 가리 켜 조선의 주먹을 뛰어넘어 동양 최고의 주먹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싸움을 본 분들중 상당수가 지금은 타계하셨거나 생존해 계시더래도 고령이신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싸우는 장면은 너무나 빠르고 민첩해 잠시 한눈을 팔다보면

뒤돌아가는 시라소니의 뒷머리만 구경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주특기인 공중걸이 박치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무릎찍기라든지 연이어 급소를 가격하는

피스톤펀치는 가히 예술이었다. 또한 그를 논할때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그의 동물적인

투쟁감각이었는데 남들보다 조금 일찍 상황을 파악 대처하는 감각이야말로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었던 그만의 무기였었다.

그는 싸움을 하나의 스포츠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이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 나갔으며

혹 컨디션이 나쁠때 패배할것을 두려워해 몸이라도 아프면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몸을

추스린후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만큼 자신의 싸움에 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패배가 뻔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인데 1953년 동대문 린치사건만 보더라도 40대 중반인 그가 충분히 도망칠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꽁무니를 뺐다는 말이 듣기 싫어서 패배가 뻔한 싸움을 자청했던

것이고 초반 20여분간 그의 명성에 걸맞는 신기의 싸움실력-이때도 시라소니가 앞서나가다 

전화줄에 걸려 넘어져 집단적으로 내지른 무기앞에서는 결국 처절하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20평의 좁은 공간에서 흉기를 든 팔팔한 주먹들과 30대1의 혈투) 

이정재가 수감 된 이후 그와 대면을 하면서 그를 감싸준 일화 역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경찰서에서 형사가 이정재를 가리키며 이 사람에게 린치당한 사실이있습니까? 하자

시라소니는 “내래 이 사람을 알긴알지만 그런 사실은 없수다”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로 그는 영원히 주먹계에서 손을 씻고 종교생활에 전념을 한다.

영락교회에서 시작한 그의 종교생활은 장안동에 있는 성복교회에서 집사생활을 하다

83년 1월 25일에 66세로 운명을 달리 하셨다.

 

시라소니는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만큼이나 이야깃거리가 많은데..

전화줄에 걸려 넘어진 동대문시장 린치사건을 제외하고는 어떤 싸움에서도 한차례도 패한적이

없었으며, 상대는 방에 앉았는데 시라소니가 밖에서 그대로 날아와 머리로 박았다는 전설에다 

제 자리에서 탁구대를 세로로 뛰어 넘은 일화라든지 김두한에게 형님칭호를 받은 사건

등은 그가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는 결정적 일화였었다.

조선의 내노라하는 주먹인 김두한.이정재.이화룡.홍영철등..도 시라소니앞에서 만큼은 감히

대적을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하며

해방전인 1945년 7월말께 친구를 초죽음시킨 일인(日人)깡패조직 가네미야(金宮)패거리와

시라소니의 40대 1로 싸워 이긴 전적은 실로 엄청난 전설이고

시라소니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꼭 한송이의 꽃이 피어 나듯이 아름 답다고 한다..

약자는 절대 건드리지않았고 그리고 시라소니가 또 위대한 점은 결코 패거리(조직깡패)를 싫어해

조직을 거느리지 않았고 혼자 다닌 강자라는 점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시라소니에게 1위의 자리를 바친다.

(인터넷등을 참조했음)

 

싸움이라는게 워낙 상대성이 강해 절대강자는 없다고 본다.

근자에 들어서서 소위 연장질(흉기나 칼)로 승부를 내는 일은 주먹축에도 못낀다고

여겨진다. 진정한 사나이끼리의 승부는 맨몸. 맨주먹 승부다.

그 외 싸움꾼이 있겠고 님들이 생각하는 강자가 있다고 한다면 댓글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게요..